섬진강의 유유함
봄강에 나간다.
높은 산 깊은 골 골에서 얼음을 뚫고 모여든 물들이 버들개지를 피우며 봄을 부르고 있다.
아래로 아래로 경계 없이 흐르며 겨울 속에 꽁꽁 묻힌 생명의 씨앗을 티우고 있다. 강에는 주인도, 밀실도, 운동도, 지역도 없다.
반만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함께 살아온 민족의 삶과 꿈과 정한이 넘실거릴 뿐이다. 봄이 오는 섬진강, 낙동강, 영산강, 금강, 한강을 시인.소설가들이 5회에 걸쳐 찾는다.
하동포구 물길 팔십리.
구례에서 하동으로 가는 길을 걷는 도중에 봄눈이 내렸다. 눈은 싱싱하게 잘 자란 보리밭 위에도 내리고 강변 미류나무 가지에도 내리고 마을의 돌각담 위에도 내렸다.
세상의 높낮이를 지워나가는 눈. 내리는 눈발을 지우며 섬진강은 오늘도 경상.전라를 함께 흐른다.
"봄눈이 푸짐하면 한 해 살림이 펴는 법이여. " 강둑에서 나물을 캐던 할머니는 처음 보는 나그네에게 기꺼이 덕담을 건넨다.
"멸치 국물에 된장 풀고 곰방부리 나물 한 줌 넣으면 그보다 시원한 봄국이 없제. " 할머니의 사투리에서 구수한 봄국 냄새가 난다.
강은 지리산의 깊은 계곡과 백운산 산자락을 비집고 천천히 흐른다. 그 강의 모습을 이곳 강변이 고향인 한 시인은 '첫날밤 새색시의 풀어진 치마끈 같다' 고 노래한 적이 있거니와 하동포구 팔십리 물길을 한번쯤 제 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어본 이라면 이 비유가 전혀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강 기슭 한쪽에 배 과수원을 들여놓고 살아가는 이재백(59) 씨는 섬진강 자랑이 많은 사람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착하지요. 지리산에 사는 산짐승들이나 꽃들과 다름 없어요. 배꽃이 피면 배꽃을 보고 살구꽃이 피면 살구꽃을 보고 살지요. "
그는 섬진강의 다른 이름이 넷이나 더 있음을 일러준다. 순자강, 악약강, 압록강, 다사강이 그들이다. 나라 안의 강들 중 이렇게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강은 없을 거란다.
그에게 압록강의 의미를 물었더니 이 강에서 사는 물오리들이 하늘로 날아 오를 때 그 울음소리가 푸른 비와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해 준다.
봄눈이 금세 그치고 햇빛이 난다. 강은 햇살을 받아 싱싱한 물빛을 뒤척이며 흐른다. 나라 안의 모든 강들 중 유독 섬진강만은 산과 산 사이를 흐른다.
보통의 강들이 중류에서부터는 어김없이 평야지대를 흐르게 되는데도 섬진강만은 산곡을 뚫고 흐르는 것이다. 영혼을 관통하는 뼈. 모든 진보가 고정관념과의 맞싸움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때 섬진강의 평온을 거부하는 이런 속성은 퍽 사랑스럽다.
1780년 어느 봄날 다산 정약용은이 길을 따라 걸으며 한 편의 시를 남겼다. "조랑말이 고개를 늘여 골짜기 벗어나니 / 나룻배 뜬 들나루에 봄물 푸르구나 / 햇살 포근한 백사장에 이제 막 장이 서니 / 부첰마다 연기 나고 술과 고기 펼쳐 있네 / 돌아보니 지리산은 안개 속에 잠겨 있고 / 청학은 높이 날아 좇아가기 힘들어라/"
뭇 백성의 살림살이에 연민이 많았던 다산이 한 나루터에 선 장을 보며 장터의 흥청거림에 얼핏 마음을 놓는 모습이 싯귀 속에 잘 드러나 있다.
다산이 이르른 그 들나루의 오늘날 이름은 화개(花開)나루다. 이름 그대로 이 나루에서는 일년 사철 꽃이 핀다.
봄이면 매화꽃과 살구꽃, 산수유꽃이 지천으로 피어나 인근 강마을을 다 무릉도원으로만들고 여름이면 이 강물 속에 눈치나 은어떼들처럼 첨벙첨벙 뛰어드는 하동들의 모습이 그대로 꽃이 된다. 가을날 지리산과 백운산 자락에 둥지를 튼 나무들이 색색의 옷을 갈아 입고 겨울날 산마을의집들에서는 밥짓는 연기가 싱그러운 꽃으로피어 오른다.
조선 시대 삼남 일대에서 가장 큰 장터가 섰다는 화개장터는 옛날의그 명성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장터거리에 자리한 고향식당에 들었을 때는 늦은 점심 시간이었다. 민물매운탕을 시키며 "이곳 손님이 전라도 사람이 많으냐 경상도 사람이 더 많으냐" 물었더니 주인 고정자(46)씨가 크게 웃는다. 자기 집에 들른 외지 손님들은 열이면 열 다 "정말로 이곳에는 지역감정이 없느냐"고 묻는다는 것이다.
"강 건너 구례 사람하고 이곳 하동 사람들은 예부터 친형제처럼 지냈지요. 조영남씨 노래보다 더요. 구례 사람들 장 보러 오면 같이 밥 나눠 먹고 불도 쬐고 커피도 같이 마시고.... 화개 아가씨들이 구례로 시집도 많이 갔어요. 우리 아저씨도 광양 사람이구요."
그때 식당 한족에서 소주를 마시던 할아버지가 말을 거들었다.
"구례 안사돈이 화개장을 보러 와서 하동 바깥사돈을 만나 악양 막걸리를 함께 마시지 않았나? 그리구 기분 좋으면 함께 어깨춤 추는 거지. 지역감정이 어딨어?"
껄껄 웃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싱그럽다. 젊은 김진성씨(26)는 자기가 다녔던 화개중학교에는 구례 아이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과는 다른 동창들과 똑같이 지냈노라 얘기했다. 군대 생활을 하며 지역감정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은 우리 대에서는 사라질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박해병(55)씨는 화개나루의 뱃사공이다. 그는 뱃사공 일이 아주 맘에 든다고 했다. 구례군에서 일년에 3백만원의 목돈을 받고 관광객들을 상대로 강을 건네 주면 휴일 같은 날은 5만원 벌이가 가능하니 이런 꿈같은 일이 어디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 기분 좋은 뱃사공 일은 3년 뒤면 영영 그만 두어야 될지도 모른다. 이곳 나루터에 2002년 완공을 목표로 다리가 놓이기 때문이다. 일이 없어지는 데도 그는 이 공사를 경사라고 얘기했다. 구례와 하동이 한 다리로 이어지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강을 건너 백사장에 닿는다. 섬진강을 다사강이라 일컬음은 넓게 깔린 모래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화개나루에서 일년 열두달 내내 피어 있는 꽆은 다름 아닌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래밭일 것이다.
스무살 무렵 섬진강을 따라 걷다가 이 모래밭 위에서 여러 날 밤을 새운적이 있다.빛나는 별들, 바람들, 꿈들, 언덕들, 그리움들... 나는 모래밭 위에 엎드려 모래밭에 쏟아지는 달빛만으로릴케와신동엽을 읽었고 세상을 향해 긴 편지를 쓰기도 했다.
나는 모래밭과 강물이 만나는 가장자리에 귀를 대고 그 옛날처럼,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세상살이에 대한 나눔과 편견없는 작은 사랑의
기억들을 스무살 무렵 나는 이 강변에서 배우기 시작했다. 먼 마을들에서 하나 둘
불꽃이 켜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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