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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끝이 함께 있는 곳
해남 땅끝마을 여행

땅끝에서 봄 이 피어나다. 힘들었던 어제, 차곡차곡 접어서 내 마음속 서랍에 넣어두고 싶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의 설계도를 그려보는 오늘, 시작과 끝이 함께 있는 곳 땅끝으로 여행을 떠나다.

 분명 처음 가는 길인데 언젠가 와봤던 곳 같고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웬지 낯이 익고, 그래서 기억해내려다가 끝내 포기했던 적이 있다. 한반도의 제일 끄트머리에 있는 마을, 땅끝에서 똑같은 일을 경험했다. 손을 뻗어 닿으면 푸른 물이 번져나올 듯한 새벽의 푸르름. 이 시첩?여명을 뚫고 붉은 해가 솟아오르면 비로소 아침이 시작된다. 1999년 겨울 어느 날 만났던 해가 그랬고, 한참이나 망설이다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다시 찾았을 땐 아무도 없이 혼자였고 그때는 희부연한 해가 지고 있었다. 해돋이와 해몰이를 모두 볼 수 있는 땅끝은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곳이다.두륜산 계곡을 흐르는 물은 아주 차가웠다. 우리는 겨울 한가운데 서 있었다.말없이 서 있는 저녁 바다. 그 엄격함과 고지식함에 몸이 떨려왔다.

 구성진 육자배기의 가락처럼 끊길 듯 이어지는 들판과 산등성이, 그리고 고지식하게 서 있는 바다. 이 모두가 공존하는 곳 또한 땅끝마을이다. 두륜산 대둔사로 향하는 길목엔 아직도 겨울이 남아 있었다. 흙이 패인 작은 웅덩이 안에 얼음이 꽁꽁 얼어 있었다. 우리는 구두 뒤꿈치로 얼음을 깨기 시작했다. 얼음은 얇아서 와삭 하며 쉽게 으깨졌다. 사그락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와삭, 사그락, 와삭… 얼음을 깨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깨진 얼음 사이로 봄, 얼굴 내밀어 인사하다.

 땅끝마을에서 해몰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송호리 해수욕장이다. 갈매기 발자국이 찍혀 있는 모래사장, 바람에 찢긴 채 아우성치는 빛바랜 어선의 깃발, 포구를 향해 치오른 갯벌의 아득함, 고개를 처박은 채 침몰해가는 녹슨 중선 한 척. 술에 취해 만선을 꿈꾸는 늙은 어부의 비틀거림…. 모래사장과 갯벌이 함께 있는 송호리 저녁은 황량하다. 그 황량함이 낯설지 않은 건 아마도 쉴새 없이 떠들어대는 갈매기떼 때문일거다.

[다산초당]
다산초당은 조선시대 실학의 대가 다산 정약용이 신유사옥과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봄햇살이 정겨운 영랑 생가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햇볕이 들지 않아 어둡고 습한, 그래서 조금은 우울한 곳이다. 이곳엔 까닭모를 슬픔에 가슴 저리게 하는 애달픔이 있다. 서적을 보관했던 서암, 그리고 그의 영정을 모셔놓은 다산초당까지 쓸쓸함이 묻어난다. 대통으로 흘러내리는 자그마한 인공 수로나 다산초당 뒤편 바위에 그가 직접 새긴 ‘正石’, 이곳에서 보낸 선생의 18년 세월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영랑 생가]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윤식이 태어난 영랑 생가는 동산 중턱 양지바른쪽 읍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터에 자리잡고 있다. 초가를 올린 사랑채 뒷마루에 앉으면 따사로운 봄햇살을 맘껏 마실 수 있다. 자물쇠로 잠긴 뒷간과 창고, 밀랍 인형이 지키고 앉아 있는 사랑채, 마루 위에 무심히 앉아 있는 책상과 책, 누군가 매일매일 닦았을 장독대, 굳게 닫힌 우물…. 강진지역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룬 후 이곳에서만 지냈던 영랑 선생. 화단 가득 심어놓은 모란꽃을 보며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하며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생각해보자, 슬픔과 기다림을 애절하게 표현한 영랑을 만날 수 있을거다.

[두륜산 대흥사]
두륜산 대흥사로 가는 길은 온통 초록과 하얀 세상이다. 즐비하게 늘어선 소나무 행진이 있고, 계곡은 얼음과 눈으로 뒤덮여 있다. 통일신라 말에 세워진 대흥사는 정조가 조선시대 승병장 서산 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표충사라는 사액을 내린 이후부터 유명해진 사찰이다. 대흥사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에 위치한 일지암은 조선시대 초의 선사가 차문화를 일으켰던 곳. 이곳에는 아직도 한 방울, 두 방울, 산에서부터 내려온 물을 대나무로 받아 찻물로 이용한다. 올라가는 길은 힘들어도 일지암을 찾아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향긋한 차를 마실 수 있다.

[해남 땅끝마을]
땅끝을 한자로 표기하면 지말(地?과 토말(土末), 토말의 어감이 지말보다 좋다고 해서 땅끝을 토말이라고도 부른다. 새벽엔 신발코를 이슬로 적신 채 가늘게 눈을 뜨고 떠오르는 해를 바라 볼 수 있다. 파란 바다 위로 무심히 떨어지는 해몰이도 볼 수 있다. 뭔가를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좋은 장소이다. 땅끝 전망대에는 망원경이 설치되어 눈앞에 한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 다도해를 만날 수 있다. 여기다 맑은 날이면 멀리 제주의 한라산까지 어슴푸레 보인다.

○ 가는 길
땅끝마을 대개 서울에서 해남에 이르는 길은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광주까지 가서 나주, 영암을 거쳐 강진, 해남으로 가는 길과 화순, 보성으로 돌아 강진으로 가는 길이 있다. 대개 2박3일 정도라면 전자가 좋지만 보다 여유가 있다면 후자의 코스를 욕심내볼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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