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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강은 경계없이 흐르고
영산강
영산강의 시원지(始原地)인 가마골 용소폭포.폭포는 지금 제 몸에 담아둔 우주의 모든 기(氣) 를 털어 떨어져내린다. 폭포를 물컵에 담아 마신다. 봄을 마신다. 온몸에 강물이 퍼진다. 솟구쳐 오르는 몸속의 버들가지들. 노령산맥의 허리에 자리잡은 가마골은 담양군 용연리의 치재산과 용추봉 사이에 형성된 계곡이다. 남도의 젖줄인 영산강이 시작되는 곳이다.
무려 1백30㎞의 물길이 남도의 드넓은 곡창을 감아돈다. 왼쪽은 강천산, 오른쪽은 추월산을 끼고 있다. 해발 6백미터의 용추골을 중심으로 원시림을 이룬다. 타고난 지리적 여건 때문에 피난민 3천여명, 빨치산이 1천여명이 머물다 간 곳이어서인가, 목쉰 아우성을 폭포소리에서 듣는다. 아우성을 품고 흐른다. 강물이 용소폭포를 지나 일제히 하강하거나 땅속 깊숙히 얼음으로 누웠다가 제 기(氣) 를 싣고 지상으로 상륙하기 시작하면 전령이 되어 나는 흰두루미떼와 이름모를 새떼들.
울음으로 전 생애의 품을 팔다가는 두견새처럼 강은 봄 내내 아름다운 제 울음으로 화답한다. 강에 봄 알을 묻히려 온 사람들이 육체없이도 강뚝 어딘가에 엎드린다. 엎드리어 운다. 금성면 대성리에 있는 담양호, 담양호를 지키는 초소 아저씨는 두눈 가득 물의 알을 촘촘히, 알알이 뱄다. 이곳 저곳 설명해 줄 때마다 봄이 출렁이다.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보면서도 아저씨! 저곳에 1시간쯤 앉아 있으면 안될까요? 묻는다. 저 아래 사무실로 가 보란다. 권한 밖의 일에 대해 정중히 사절하시는 것이리라.
아,그렇지. 저런 분이 계시기에 담양호에는 이미 물의 알이, 봄이 출렁이는 것이겠지. 김병호 소장님께 전후 사정을 말씀 드렸더니 너무나 친절하게 안내해 주신다. 금지구역의 팻말을 넘어 깊숙히 찾아드니 담양호는 주야창창, 사시사철 쓸어담아 두었던 생명의 씨앗들을 새 천년의 첫 봄 강에 툭툭 터트리고 있다. 씨앗 터트리는 소리가 제방의 강둑을 텅텅 두드린다. 그너머 논밭산까지 텅텅 울린다. 통통히 알알히 퍼진다. 이처럼 찬란하게 색, 내음,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 하늘 아래 또 있을까.
담양호를 찾아온 사람, 가족들을 뒤로하고 담양의 명소인, 영산강의 중상류에 속하는 관방천(官防川) 에 들어서니 사람 몸도 물이 되고 새가 되고 꽃이 되는 것 같다. 흐르는 물결 위에서 반짝이는 햇살들은 마치 안 보이는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아름다운 영혼들의 몸체같다.
봄강의 눈부심에 발 적시고 싶어져서 아무런 걱정없이 걸어 들어가면 무수한 새떼의 발이 되어 걷게해 줄 것 같은 관방천의 물 무늬를 하염없이 본다. 심장이식, 간장이식 수술을 하듯 사람과 맞는 햇살 공기 물결을 이식받고 싶다는 간절함에 젖는다.
관방천 계단에 앉으니 담배 꽁초가 즐비하다. 잠시나마 담배연기와 강물, 두 가벼운 존재에게 무거운 육신을 맡기다가 일어선 이들에게서 떨어져 내린 허물들로 이해하고 싶어진다. 그곳의 담배 꽁초 모두를 줍고 일어선다.
강의 간절함 사이 사이에 제1번 목(木), 제2번, 제3번 목(木) 등의 이름표를 매단 수백년생(生) 나무들이 봄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제1번 나무인 푸조나무는 아랫도리에, 허리에 피 한방울 물 한방울 스밀 수 없는 시멘트로 땜질을 한 채 서 있다. 이렇게 살아 있는 푸조나무는 이미 푸조나무의 생애라기 보다는 이 마을을 낳아 준 강물과 마을을 위한 여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물과 나무들은 오랫동안 사랑으로 마을을, 사람을 품었으나 사람들은 물과 나무들을 조금씩 죽이고 있다는 씁쓸함에 떤다. 하필 사람이 물의 적(敵)이 되어가고 있구나, 어쩌지? 수북면 병풍산을 오른쪽에 끼고 흘러 나주호를 이룬다. 영산강의 중상류로 접어드는 나주호는 대초천이라 불린다. 담양호보다 더 장중하면서도 수려한 나주호. 봄 강의 싱싱한 몸체 위에 누우니 잃어버렸던 아름다운 순간들이 알알히 살아서 퍼덕인다. 물 무늬 속에 들어가 온몸을 봄 강의 무늬로 문신한다.
왜 강에 오면 모든 기억이 되살아나는가. 매듭이 없고 경계가 없어져 버려서? 흐르고 흐르는 일이 위에서 아래로 묵묵히 흐르는 일만이 강물의 삶이어서?
강은 강을 위해 제 몸을 수없이 정화하지 않으리라. 물의 정화, 물의 세례의 힘이 핵분열처럼 확산되고 있는 거대한 댐 위에서는 물질의 쓰레기, 정신의 쓰레기들이 무력하게 죽어버린다는 것을 확인한다. 물의 정화, 물의 세례의 현장을 돌면서.
연산강의 중류가 시작되는 구진포, 밤의 구진포는 아름다웠다. 가야산이 병풍처럼 앞을 두르고 마을 한가운데에 강물이 흐른다.
봄 강도 잠을 자는가. 혹은 한 객이 미덥지 못해서 탐색중인가. 성급한 친절, 성급한 소외를 사양하겠다듯 어둠 속 구진포의 강물은 서로 짜맞춘듯 미동도 없다. 그러다가 구진포를 돌아서는 나그네의 등에 너그러움의 몸속엔 뜻밖에도 피할 수 없는 더러움이 숨어 있기도 한다는 아픔을 슬그머니 내어 놓는 것 같다.
날이 밝아 구진포를 다시 찾아 이 마을에서 40년을 살아오셨다는 올해 71세의 임종영 할아버지를 만나뵈었다. 민물장어를 많이 드셔서인지 너무나 젊으시다. 예전엔 투망만 던지면 민물고기들을 수백마리씩 건져올렸으나 지금은 뿌리지 않아도 저절로 봄 강의 꽃천지를 이루는 유채꽃뿐이라며 가벼운 탄식을 뱉으신다.
영산호는 목포 삼양동에서 영암군 삼호면 산호리까지 토석촌(土石村) 로 댐을 쌓았다. 영암일대가 한때 큰 바다였다는 증거인양 논과 논 사이의 둔턱엔 숲을 이룬, 거의 수수밭같은 갈대밭이 장광이다. 이런 풍경을 품고 있는 월출산은 신기(神氣)를 구름처럼 피워올려 강으로 흘러내리게 한다.
영산강의 하류인 영산호에 와서 본다. 물이 저 살아 있음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물결을 만들어내고 물결소리를 내 보내고 있음을. 물결과 물결 소리 또한 수많은 양의 물의 또 다른 목숨이어서 매 순간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을. 그 생사의 반복을 사람의 눈으로는 쉽게 읽어 낼 수는 없다. 다만 큰 모래 작은 모래인양 백사장을 이루고 있는, 모래 둔턱을 이루고 있는, 물의 안을 입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새하얗게 탈색된 귤 껍질 무더기를 보면서 문득 해골을 연상한다.
숨 쉬는 에너지를 상실한 뒤 강의 하구에 남아 우주의 또 다른 작은 기(氣)로 돌아가기 위해 제 힘으로 제 몸을 분해시키고 있는 모습 같아서다. 강 속의 생사, 그 윤회를 보는 것 같아서다. 강물에도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입이 있어 물결과 물결소리로 세상을 향해 보여주고 싶은, 외치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이 두고두고 있겠지 싶어서이다.
핏줄같은 강의 줄기가 끊어질듯 끊어질듯 이어져, 흐르고 흘러 강폭을 넓히고 깊어지면서 또다시 강폭을 좁히고 얕아지면서 영산강의 시원지인 담양군 용면 치재산의 가마골 용소폭포에서 최 하류인 영암군 영산호까지 무려 1백30㎞의 물길을 잇고 있다.
긴 물길을 잇는 이러한 힘이 목마른 곳에 흘러, 쓰라린 곳에 흘러, 즙이 되고 옥도정기가 되고 세례가 되고 존재의 어미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강물의 생애가 곧 사람의 생애라고 느껴진다. 살아있는
존재의 내력, 그 생애의 오욕은 비슷할 것 같아서이다.■
자료제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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